이윤재목사/아들아, 달려라 (잠 1:8/엡 6:4) (2024)

이윤재목사/아들아, 달려라 (잠 1:8/엡 6:4)

아름다운 가정의 달이 돌아왔습니다. 이 5월에 행복한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아닙니다만, 옛날 영국에서는 왕이 될 수 있는 나이와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왕이 될 수 있는 나이는 18세이고, 결혼할 수 있는 나이는 20살이었습니다.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왕이 될 수 있는 나이보다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왕이 되기 보다 남편이나 아내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내나 남편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결혼하면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됩니다. 그러나 부모가 되는 것은 결혼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좋은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되는 것의 가장 어려운 것은 잘 카우는 것입니다. 양육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겠습니까?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

여기에 양육하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문법적으로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명령형 입니다. 자녀 양육은 부모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다음은 능동형 입니다. 이 말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해야 하고 기쁘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재형 입니다. 자녀양육은 지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번 다음에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리가 잡힌 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맡은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녀 양육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 필요합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4절, 아비들아 . 왜 바울은 어미들아, 아비들아 하고 부르지 않고 아비들아 하고 불렀을까요? 아버지에게만 자녀양육에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까? 실제로 가정에서 자녀 양육의 많은 부분을 맡고 있는 것은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들이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어머니가 먹이고 어머니가 얼르고 어머니가 안아주고 어머니가 재웁니다, 어머니 없이 자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국 속담대로 요람을 밀어주던 손이 세상을 다스립니다 . 그러나 어머니들만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들은 밖에 나가 돈벌고 어머니가 집에서 자녀를 가르친다 . 소위 업무분담론입니다. 하도 아버지들이 밖에만 있으니까 밤에 들어오는 아빠를 보고 묻습니다. 엄마, 저 아저씨 누구야? . 자녀양육의 편식입니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만 있습니다. 학교에 가봐도 여선생님만 있고 남선생님들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만 있고 아버지의 까끌까끌한 수염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버릇이 없습니다. 4절 뒷 부분을 보십시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 자녀양육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교양과 훈계입니다. 교양과 훈계는 하나님의 말씀의 두 가지 요소입니다. 교양은 교훈의 말씀이요 훈계는 경책의 말씀입니다. 교양은 잘한다 는 말씀이고 경책은 하지 말라 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잠1:8절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 여기에 훈계 란 말과 법 이란 말이 나옵니다. 훈계는 히브리어로 무사르 입니다. 이 말은 징계 나 매 를 의미합니다. 법 은 율법 곧 토라 를 의미합니다. 결국 무사르 는 매로 때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고 토라 는 말씀으로 싸매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양육을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되는 데 아버지는 안됩니다. 어머니는 지나치게 잘하는 데 아버지는 지나치게 못합니다. 어머니는 넘치는 데 아버지는 모자랍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아비들아 하고 말합니다. 자녀양육의 책임이 어머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을 아내에게만 맡기지 말고 남편인 너도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내와 남편은 다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릅니다. 각가 고유한 위치와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가정에서 남편이 그 날따라 몸도 아프고 피곤한데 어쩔 수 없이 직장에 가기 우해 집을 나서다가 소파에 길게 누어 잠을 자는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픈 데 직장에 가야 하는 데 아내는 펴저 잡니다. 제발 며칠만이라도 역할을 바꿔주옵소서 . 하나님이 그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어 다음날 보니 자기가 아내가 되고 아내가 남편이 되어 있었습니다. 직장에 안 가게 된 남편은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직장에 갈 남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 갈 준비를 시켰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게 한 후에 점심을 챙겨주고, 학교에 데려다 준 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오니 빨래를 수북히 쌓였습니다. 세탁기에 넣고, 드라이크리닝을 해야 할 옷을 세탁소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은행에 들러 전기세, 전화세를 내고 마켓에 들러 저녁식사거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자마자 침대를 정리하고,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후2시가 되자 헐레벌떡 뛰어 아이들을 데리러 가서 데려온 후 집에 와서 숙제를 시켰습니다. 오후 5시가 되자 저녁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나물을 다듬고, 국을 끓이고, 그 사이에 또 빨래접고 아이들 숙제검사하고 밤 9시가 되자 아이들을 씻어 잠자리에 들게 했는 데 남편이 들어올 때쯤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며칠 그렇게 하다 보니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를 잘못 한 것 같습니다. 다시 바꿔 주세요. 힘들어도 너무 힘들어요 . 그랬더니 하나님이 대답하셨답니다. 내 아들아, 고생이 많았다. 네 소원을 들어주마. 그러나 앞으로 10개월은 더 참아야 한다. 그 이유는 네가 어젯밤 임신했기 때문이다 .

남편과 아내, 고유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경험하는 것은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보호와 안정을 느끼며 자랍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도 필요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우리는 자신감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웁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성장의 자양분인 것은 맞지만 너무 기름진 음식이 몸에 좋지 않듯이 너무 과한 어머니 사랑도 좋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만족감과 안정감을 얻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사는 방법과 자세를 배웁니다.

옛날 성경시대의 이버지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기술과 직업을 전수했습니다.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존재의 정체성과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아들은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미래 자신과 일치시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의 미래의 자화상입니다. 그래서 좋은 아버지 만나면 자신감이 생겨 성공합니다. 딸은 아버지를 통해 미래에 이루어질 가정을 봅니다. 그래서 좋은 아버지를 만나면 남자에 대한 좋은 생각이 생겨 행복한 가정을 이룹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사는 힘을 제공한다면 아버지는 자녀에게 사는 표준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같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아버지는 자녀에게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실제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 교인의 생일예배에 참석하려고 갔습니다. 그때 세 살 먹은 딸이 있었는 데 친척들이 그를 보고 귀여워 하며 물었습니다. 아가, 이 사람들이 누구야? 했더니 어린 딸이 둘러 보더니 말합니다. 응, 엄마, 할머니, 삼촌... 하다가 아빠를 가르키며 말합니다. 하나님 . 그래서 모두 웃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뭐야. 하나님 아니야 . 했더니 딸이 말합니다. 예수님 . 사람들이 또 웃었습니다. 엄마가 또 말했습니다. 예수님 아니야 . 그랬더니 아기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아빠 하나님 . 그때 사람들은 웃었지만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 마음 속 깊은 곳에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보는 본성이 있는가?

그래서 그런지 이스라엘 가정에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거실의 소파나 식탁의 의자에는 반드시 아버지가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출장으로 몇 달간 자리를 비워도, 심지어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그 자리는 아버지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자리는 아이들이 장난을 칠 자리가 아닙니다. 아무나 그 자리에 올라서 놀아서도 안됩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다 압니다. 저, 자리는 아버지 자리다. 아무나 앉으면 안된다 . 옛날에 우리도 그랬습니다. 식탁에서의 아버지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들지 않으면 아이들이 먼저 수저를 들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아버지가 먼저 들어야 합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어머니가 말합니다. 애들아, 이것은 아버지 드실 것이다 . 그래서 어릴 때 제가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쌀밥입니다. 보리만 먹던 가난한 시대, 쌀밥은 할아버지, 아버지 몫이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김입니다. 김이 귀한 시대에 김은 아무나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먼저, 아버지 먼저, 다음 아들, 손자들입니다. 은혜로운 할아버지가 가끔 손자들 위해 김을 남깁니다. 그때 할아버지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이스라엘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고 세상 모든 나라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아버지를 통해서 보려고 하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버지가 중요합니다. 인간적으로도 중요하고 신앙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아버지는 우리 성품과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고 신앙적으로는 아버지가 좋으면 하나님도 좋고 아버지가 나쁘면 하나님도 나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절을 다시 봅시다. 엡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녀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홧김에 불 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홧김에 사람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충동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격발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엽게 한다 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도 하지 말고 혼내지도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본 잠1:8에서 아버지는 자녀에 대하여 훈계 할 권한을 받았습니다. 훈계는 나무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분명히 훈계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잠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 영어 속담에도 회초리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 (Spare the rod, spoil the chlid)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학대와 훈계는 다릅니다. 학대는 폭력이고 훈계는 교육입니다. 학대는 불공평한 것이고, 훈계는 공평한 것입니다. 학대는 극단적이고 훈계는 적절한 것입니다. 학대는 자존감을 해치지만 훈계는 자존감을 세워줍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노여움을 느끼는 것은 잘못했을 때 꾸지람받을 때가 아니라 별 잘못도 없는 데 아버지가 감정적으로 분노할 때입니다. 정상적인 훈육은 아버지의 권리요 자녀들도 그것은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유없는 감정의 폭발입니다. 이유없이 감정을 상하게 해서 자녀의 분노심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들은 가끔 자녀들에게 쓸데 없이 분노할까?

아마 첫 번째는 좋은 의미에서 기대가 커서 그럴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기대가 큽니다. 나는 못했지만 자식은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버지에게 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제가 어릴 때 아버지 어땧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마디로 높이뛰기였습니다 횄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육상 선수가 높이뛰기하면 가로대를 올립니다. 2미터를 뛰면 2미터 10센티를 올리고, 2미터 10센티를 뛰면 2미터 30센티를 올립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아버지는 자기에게 늘 더 높은 수준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반에서 10등 안에 들어라. 해서 10등안에 들면 3등 안에 들어라. 그래서 죽어라 공부해서 3등했더니 이번 시험이 쉬었나 보지?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1등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계속 높이뛰기의 가로대를 올리는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한번 잘한다고 칭찬해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지치고 상처받아 공부고 뭐고 다 때려 치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지나친 가대가 자녀를 노엽게 한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또 하나는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낳았으니 내가 알아서 키운다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옛날 부모들이 입만 열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 이 말만 하면 자식들이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부모들은 자식들을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키웠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들을 그렇게 키운 대가로 너무 많은 희생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 데 네가 나에게 그럴 수 있느냐 . 그래서 통계에 의하면 젊은이 100명중 70명이 부모를 미워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부모가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뉘신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까? 그것도 모른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는 부모가 너무 강압적으로 자식들을 누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식들을 노엽게 하면 자식이 비틀어 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아버지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무신론의 심리학>이란 책이 나왔습니다(사진). 이 책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의 가정을 연구한 책입니다. 연구의 결과는 놀랍습니다. 무신론자 100%는 모두 아버지가 잘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니체, 프로이트, 샤르트르,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모두가 아버지가 없거나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나쁜 아버지였거나 자식에게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먼저 무신론자 니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이 죽었다 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이 사람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약했습니다. 병들고 약하고 생기없고 자녀들과 대화가 없고, 그래서 결국 니체는 평생 병들고 나약한 기독교를 평생 공격하며 살다가 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공격한 병든 기독교는 아버지였습니다.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가 있습니다. 이 사람 아버지는 자살했습니다. 어머니와 아주 나쁘게 지내다가 건물 3층에서 운하로 뛰어들어 자살로 죽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이 심해서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를 낳을 마음도 없었고 낳은 후에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불행한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아버지 야콥은 아들이 보기에도 실망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도 없는 데다가 성도착자였습니다. 그의 성적인 심리학은 아버지가 모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적 혐오와 거부감이 그의 무신론적 심리학의 출발입니다. 시베리아를 피로 물들인 소련의 스탈린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거칠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느라 집을 자주 비웠고 술을 많이 마셨고 아내를 때렸습니다. 어린 스탈린은 어릴 때 그래도 착해서 신학교까지 들어갔지만 나중에 신학교를 중퇴하고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잡자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 6천만을 죽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어릴 때 자주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관심이 없고 강팍하고 다혈질적인 남자였습니다. 아버지가 몰래 좋아한 여자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 그는 훗날 유대인 600만명을 죽였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사실상 유대인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그 많은 무신론자들을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를 통해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좋으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잘못되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버지라면 자녀들에게 하나님처럼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녀라면 아버지를 하나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만일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았는 데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나 해서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살아 있으면 찾아가서 용서하고 돌아가셨으면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저는 구약을 읽으면서 많은 교훈을 받습니다. 구약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네 족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네 사람은 좋은 것도 물려 주었지만 나쁜 것도 물려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위기의 순간에 자기 아내 사라가 누이라고 두 번이나 거짓말 합니다. 이삭은 이것을 이어 받아 자기 아내 리브가가 누이라고 거짓말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한 술 더 떠서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가로채고 집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이스마엘 두 아들 중에서 이삭을 편애하자 이삭은에서, 야곱 두 아들중에서 야곱을 편애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12아들 중에서 요셉을 편애합니다. 아버지들이 했던 것을 고스란히 아들들이 합니다. 거짓말도 이어받고 편애도 이어받습니다. 드디어 네 번째 요셉대에 이르렀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아들 둘을 낳았는 데 큰 아들은 므낫세요 둘째는 에브라임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의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므낫세는 잊었다 는 뜻이고 에브라임은 용서했다 는 뜻입니다. 요셉은 무엇을 잊고 무엇을 용서한 것일까요? 과거 아버지들이 했던 실수를 잊고 아버지들이 준 상처를 용서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세상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들이 한 좋은 것만 가져가고 나쁜 것은 잊거나 용서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의 상처가 사라져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자녀를 둔 아버지입니까? 당신 자신이 곧 하나님입니다. 자녀들은 당신을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아버지인 여러분이 신앙생활 잘 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혹시라도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아들, 딸 모아 놓고 말하세요. 애들아, 미안하다. 아빠가 좋으신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해 미안하다. 내가 노력할께. 아빠를 위해 기도해 다오 . 이렇게 말하세요. 혹시 여러분의 아버지가 살아 계십니까? 인간적으로 실수가 많아도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여러분의 하나님입니다. 그 아버지를 존경하세요. 아버지의 자리를 그대로 두세요.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상처받고 아직 치유가 안된 분도 있습니까? 요셉처럼 잊고 용서하세요. 그래야 당신의 가지가 담을 넘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합니다. 아버지, 미안해요. 사랑해요. 용서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 아버지와 화해해야 하나님과도 화해합니다.

부모의 일은 자식을 잘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부모가 아버지가 하나님이라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처럼 축복해야 합니다. 축복해서 세상으로 보내야 합니다.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의 기능은 자녀의 나이에 따라 변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3C를 말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 부모는 자녀의 Coach가 되어야 합니다. 코치와 감독은 다릅니다. 감독은 벤치에 앉아서 작전만 지시하면 되지만 코치는 선수와 함께 뛰고 함께 뒹급니다. 그러나 감독이든 코치든 지도자란 점에서는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부모를 호라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네 단어와 어근이 같습니다. 먼저 토라, 말씀입니다. 부모는 자녀엑세 말씀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모라,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게 스승입니다. 하라,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게 큰 산입니다. 어릴 때 부모는 자녀를 가르치는 코치입니다. 그러다가 자녀가 사춘기가 되면 Counseller, 카운슬러가 되어야 합니다. 상담자가 되고 대화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식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가 자녀가 결혼하면 Companion,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하기보다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친구, 나이먹은 친구, 경륜과 믿음을 가진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세상에 보내 용감하게 달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중 포레스트 검프 가 있습니다. 주인공 행크 아론은 아이큐 75의 남자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그는 선척적으로 저능아인 데다 척추에 이상까지 있어 양다리에 보조물을 달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 어머니는 항상 용기를 줍니다. 너는 남과 다르지 않다. 저능아란 단지 다른 사람보다 지능이 좀 모자라는 것뿐이다.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 어느날도 레스트 검프가 아이들로부터 심한 구타와 놀림을 받고 있을 때 어머니가 소리쳤습니다. 포레스트, 달려라. 서 있지 말고. 달려라 . 그때 포레스트는 무거운 척추 보조물을 달고 있다는 생각도 잊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그의 다리에 운명처럼 달려 있던 보조물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바람처럼 달릴 수 있게 됩니다. 월남전을 마치고 돌아온 포레스트에게 어머니가 갑자기 죽습니다. 그러자 직업도 잔디깍는 정원사로 바꿉니다. 어느날 하루 종일 잔디 깍는 일을 하던 그에게 어머니 목소리가 들립니다. 포레스트, 달려. 서 있지 말고 달려라 . 그래서 그는 잔디깍는 기계를 놓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몇 년이 계속되는 그의 달리기에 온 매스컴이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도 생깁니다. 수많은 인터뷰에 대한 그의 답변은 오직 한가지뿐이었습니다. 나는 다만 달리고 싶기 때문에 달립니다. 함께 짧은 영상을 보실까요? (영상).

저능아이고 척추까지 않좋은 아들이 일어나 달린 것은 그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자녀들이 달리기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나쁘다고, 환경이 나쁘다고, 학교 성적이 안 좋다고, 몸이 약하다고 자신감없이 누어 있는 자녀에게 그래도 너는 할 수 있어. 저능아란 다른 사람보다 지능이 좀 모자라는 것뿐이야. 너는 할 수 있어 하며 일으켜 세워 달리게 할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부모는 이 땅에 사는 실수많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이 땅에서 가장 하나님을 닮은 작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 자녀들을 축복합시다. 너는 할 수 있어. 아들아, 딸아, 일어나 달려라. 네 뒤에 엄마가 있지 않아. 아빠가 있지 않아. 일어나 달려라. 하나님이 이끄는 미래로. 달려라 .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잠1:8, 엡6:4 2013.5.5(일)
아들아, 달려라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

양육하라=명령형+능동형+현재형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필요합니다.
잠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엡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
잠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

<무신론의 심리학>(사진).

니체
쇼펜하우어
프로이드
스탈린
히틀러

므낫세= 잊었다
에브라임= 용서했다

부모의 일은 자식을 잘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3C
어릴때는 Coach(코치)
사춘기때 Counseller(카운슬러)
결혼하면 Companion(친구)

포레스트 검프 (영상).

이윤재목사/아들아, 달려라 (잠 1:8/엡 6: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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